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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0] 상하이와 자매결연에 대만계 주민 원성···2006 시장 재선 앞두고 또 다시 위기

2006년 재선 여부가 걸린 선거를 앞두고 또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어바인에는 대만계 홍콩계 대륙계 등 다양한 중국계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중국계 커뮤니티라는 큰 범주 안에서는 하나가 되지만 일상에서는 서로 다른 민족처럼 따로따로 어울리는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대만계와 중국 본토에서 온 이민자들은 정치적인 배경 때문에 서로 미묘한 대립 관계를 형성하곤 했다. 한번은 상하이 시에서 어바인에 자매결연을 요청해 왔다. 나는 준비위를 발족시켜 1년 반 이상 준비를 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준비가 끝난 뒤 시장과 몇몇 시의원 그리고 자매도시 위원회 임원들과 함께 2006년 6월 상하이를 방문했다. 우리는 상하이 측과 자매도시를 맺는다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지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OC 레지스터'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나왔다. 시장 일행이 상하이에서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부당한 조항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 측이 작성해 제시한 양해각서 조항에 '하나의 중국' 원칙에 의거해 중국의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어바인의 지도자들은 대만을 공식적으로 여행하지 못하며 대만 국기를 공식 행사에 게양하지도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였다. 베스 크롬 시장은 이런 조항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당시 한 실무자가 실수로 서명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바인 방문단이 이런 내용의 자매도시 결연 합의문에 서명했다고 보도가 되었으니 어바인의 대만계 이민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공화당 쪽에서도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대만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LA 인근 몬터레이 파크 지역 주민들은 단체로 버스를 빌려 타고 어바인에 몰려와 시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랜 시간 발로 뛰면서 많은 중국계 인사들을 내 편으로 만들었고 자매도시 결연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만의 타오위안 시를 방문하기도 했건만 자칫 그동안 쌓아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처참한 상황이었다. 재선을 위한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짙은 먹구름이 낀 것이다. 대만계 주민들이 등을 돌리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나는 대만계 지도자들과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번 사건은 순전히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 사건은 상하이와 맺었던 자매도시 협약을 파기하고서야 가라앉았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0-0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9] "의정 활동 큰 자산은 주민들과 나눈 대화", '노스 어바인 하이킹코스' 4년만에 해결

선거 유세 중에 주민들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은 나의 의정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주민들이 지금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바인 시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신청을 받아 집에서 픽업하고 다시 집까지 데려다 주는 택시형 버스 프로그램인 '트립스(TRIPS)'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가호호 방문 중에 만난 80대 노인 한 분이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트립스 프로그램을 신청하려 하니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당신이 시의원이 되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제발 대기 기간이 줄어들도록 힘써주시오" 하고 애원하듯 말했다. 시의원이 되기 전 어바인 시청 재정위원으로 있을 때 이 문제를 담당 국장과 의논했더니 처리를 수작업으로 하는 데다 차량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시의원이 되자마자 이 문제를 첫 의제로 올렸다. 차를 한 대 더 구입하고 운행 프로그램을 전산화해 대기 기간을 2개월 이하로 줄이자는 내용이었다. 이 의제는 곧바로 통과되었고 지금은 대기 기간이 거의 없어져 많은 노인들이 편리하게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다. 내가 유세 기간 동안 주민들로부터 들었던 민원이 기초가 된 의제가 또 한 가지 있다. 갈 때마다 사람이 없는 집이 있었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 겨우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시의원에 출마했다고 인사를 한 뒤 주민들이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문제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바인 북부 지역에는 주민들이 마음껏 산책할 수 있는 하이킹 코스가 없다고 불평했다. 그는 지도와 각종 자료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시의원이 되면 우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당부했다. 시의원이 된 다음 나는 곧바로 어바인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어바인컴퍼니'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나는 주민들이 하이킹 코스가 없어서 불편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주민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어바인컴퍼니 소유의 미개발 지역에 임시 하이킹 코스를 만들어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들은 하이킹 코스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주정부 환경자원국으로부터 녹지대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하는 문제 등으로 시간이 걸린다면서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미국은 녹지대 보호 정책이 상당히 강력하기 때문에 환경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규제 완화에는 대단히 신중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 나는 이 이슈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줄기차게 주장했고 마침내 4년여 만에 약 5킬로미터에 달하는 '노스 어바인 하이킹 코스'가 일반인들에게 오픈되어 많은 주민이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교육 문제도 내가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던 만큼 나의 의정활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바인 교육구가 예산이 부족해 매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정부에서 교육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견을 냈다. 워낙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라서 교육의 질을 높이자는 제안에 반대하는 의원은 없었다. 나는 시정부가 예산을 집행한 다음 잉여 예산이 발생할 경우 10퍼센트를 교육구에 지원하자고 제안했다. 교육감에게 어떤 예산이 부족한지 물었더니 학생들의 건강 프로그램에 대한 교육 재원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잉여 예산의 10퍼센트를 교육구에 지원하자는 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이 지원금은 교육구가 양호교사를 충원하고 상담 교사를 늘려 학생들의 건강 증진과 마약 중독 방지에 활용하기로 했다. 첫해에 130만 달러가 조성되었고 항상 돈이 부족해 고민하던 교육구는 구세주를 만난 듯 쌍수를 들어 시의회의 결정을 환영했다. 이 지원금은 매년 어바인의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0-07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8] 2004년 12월 '시의원 강석희' 첫 등원···저녁 굶은채 8시간 혹독한 새내기 체험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2004년 12월 12일 시의회의 첫 회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의사당에 들어섰다. 우리 민주당은 시장을 포함해 세 명 상대 공화당은 두 명으로 우리 진영이 다수였기 때문에 의사 결정권이 있었다. 우리는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고 지지자들도 취임식에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반면 상대팀은 침체된 분위기였다. 의회는 전쟁 모드라고나 할까 선거 캠페인이 그대로 이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양측 모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편의 의견에 화살을 날리는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의사당을 가득 메웠다. 첫날은 의결해야 할 안건이 상당히 많았다. 취임식을 끝내고 오후 4시에 바로 의사 진행으로 들어가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새내기 시의원으로서 혹독한 경험을 했다. 저녁도 못 먹고 무려 8시간을 단상에서 지낸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의 취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현장에 나왔던 60대의 한인 두 분은 끝까지 의사 진행을 지켜보았다. '시의원 강석희'의 첫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셈이다. 두 분은 일정이 끝난 뒤 내게 다가와 수고했다면서 미국 지역 정치인들의 민주적인 토론 모습을 한국의 정치인들이 꼭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도 서로 소속된 당은 다르지만 활발하게 의견을 피력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보면서 타협을 모르는 한국의 국회를 떠올렸던 모양이다. 시의원으로서 첫 근무를 마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고 실전이구나 앞으로 내가 맞닥뜨리게 될 어려움이 첩첩산중이겠구나 시의원이 되는 일보다 시의원으로서 활동하는 일이 더욱 어렵겠구나 방청객들은 하나같이 전문가들인데 어설프게 발언을 해서는 망신을 당하겠구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의제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상정되었는지 충분히 파악할 때까지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시정 현안이 무엇인지 민원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의사당에서 자신 있게 이슈를 이끌어나가려면 아직 시정 이슈에 대해서 미숙하고 전문용어에 대한 불안감이 적지 않은 터에 앞으로 의회에서 이야기할 것은 완벽하게 익히고 또한 글로 써서 발언하면서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새내기 시의원으로 첫날을 보내면서 나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결의를 다졌다. 나는 늘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 시작은 어렵더라도 몸으로 부딪치면서 하나하나 이루어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 영어 연극을 할 때도 그랬다. 연습할 때는 항상 어딘가 부족하고 잘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서면 달랐다. 연극을 잘해냈던 것처럼 두려움을 이겨내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대학 시절 영어 웅변대회에 나갔을 때도 그랬다. 단상에 올라가기 전에는 자신 없고 겁이 났지만 단상에 올라서면 500명의 청중 앞에서 성공적으로 연설을 마치고 대학부 1등상을 거머쥐었다. 서킷시티에 입사해서 여러 어려운 과정을 극복할 때도 그랬고 한인사회의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면서도 그랬다. 시작은 항상 불안했지만 해보자고 각오하고 정작 무대에 올라서면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려 나갔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가치 있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도전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0-06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7] 막상 시의원 당선되고 나니 걱정 태산···가장 두려운 것은 주민들 눈과 귀였다

미국의 개표 과정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답답할 정도로 더디다. 어찌 보면 어수룩할 정도다. 2000년에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 막판에 엄청난 혼란을 겪었던 것도 까다로운 개표 과정과 수작업에 의존하는 관행 복잡한 기표 방식 그리고 방대한 지역 탓에 최종 집계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 당일 자정을 넘겨 발표된 잠정 집계 결과 3위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모든 언론이 '강석희 당선' 기사를 내보냈고 지지자들도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축했다. 그러나 잠정 집계는 말 그대로 잠정이지 최종 결과가 아니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3주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부재자 투표와 우편 투표의 개표 133개 투표소의 재검표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주일 동안 얼마나 애간장이 탔는지 재검표 결과 낙선되는 꿈을 꿀 정도였다. 나는 가족들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표 결과가 매일 업데이트되는 사이트에 들어가 득표수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얼마 동안은 2위로 껑충 올라갔다가 며칠 후에는 다시 3위로 내려가는 롤러코스터 행진을 반복하고 있었다1 2위로 당선되면 4년 3위로 당선되면 2년의 임기가 주어진다. 득표수 격차가 계속 줄어들면 어떡하나 가슴이 덜컹했다. 개표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렇게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4위와 200표 이상의 격차를 꾸준히 유지하며 안정적인 3위를 다지게 되었다. 다소 마음이 놓였다. 나는 2년 후에 다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약점을 안고 3위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로서는 일단 당선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3위 당선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당선이 되고 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내가 과연 복잡한 행정 전문용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전문적인 이슈에 대한 시의회 토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내 영어 실력으로 백인 일색인 시청 직원들과 시의회 동료들과 잘 소통할 수 있을까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의 시선은 없을까 여러 가지 부담이 나를 짓눌렀다. 가장 두려운 것은 시민들의 눈과 귀였다. 의회의 의사 결정 과정은 대부분 일반인들이 참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시의회의 토론 과정은 시 방송국을 통해 생방송으로 방영되기 때문에 자칫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면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 정치에 관심 있는 주민이나 이해관계가 걸린 사업자들이 관람석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의원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듣는다. 이렇게 대중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내가 과연 소신 있게 정책을 토론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안을 내는 등 시의원으로서의 기본적인 과제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기쁨보다는 중압감이 더 컸다. 시의회에서 의원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모습을 이미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 장면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시절 힘든 일에 부닥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나는 거듭 마음을 다잡았다. 시의회 개원에 앞서 나는 시청의 각 부서 국장들로부터 시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어바인은 180.5제곱킬로미터 여의도의 약 19배로 오렌지 카운티의 34개 도시 중에서 면적이 제일 넓으며 전체의 약 45퍼센트가 녹지대이다. 시가 소유한 많은 공원 경찰 상황실 커뮤니티 센터 동물 보호소 시설 관리 공단 탁아소 등등 수많은 시 기관들을 방문하여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자연 선거 후 숨 돌릴 시간도 없이 나는 학습에 전념해야 했다. 〈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0-0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6] 한 도시에 한인 의원 두명 탄생 '기적'···주류 언론 '거인 깨어나다' 대서 특필

역시 정치판이란 진흙탕 싸움이었다. '내가 왜 이런 데 끼어들었지? 잘하다가도 이런 근거 없는 네거티브 공세에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정면 돌파하는 길밖에 없었다. 십수 년 동안 시장과 시의원을 지낸 베테랑 정치인 에이그런의 대응은 역시 노련했다. "상대팀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 있게 하던 대로 하세요. 최종 결정은 유권자들이 할 겁니다." 그는 이런 말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우리는 진상을 알리는 우편물을 보내는 한편 직접 주민들을 만나 이해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10월에 다시 지지도 조사 결과가 나왔다. 상대팀의 네거티브 공세가 주민들에게 그리 먹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팀의 베스 크롬 시장 후보가 상대 후보에 근소한 차이로 밀리고 있을 뿐 공화당의 최석호 후보와 나는 각각 2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래리 에이그런은 부동의 1위를 유지했다. 상대 팀의 혹독한 네거티브 공세에도 지지도가 크게 흔들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우리는 더욱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 에이그런 시장도 당선이 확실시된다며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4위와 불과 몇 백 표 차이로 3위권을 유지하던 나로서는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월 2일 드디어 투표함이 열렸다. 베스 크롬 시장 당선 시의원에 에이그런 최석호 후보 나 이렇게 순서대로 당선되었다. 한인 시의원 두 명 당선이라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표가 분산되어 두 사람 다 낙선 카드라며 한인사회를 실망시켰지만 결과적으로 두 명 모두 당선됨으로써 한인사회에 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다. 어바인 최초의 동양계 비백인계 시의원 탄생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것이다.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 신문은 '거인이 깨어나다'(Giant is awakening)라는 제호로 최석호 씨와 나의 동반 당선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신문은 아시아계 주민들의 정치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팀은 시장과 두 명의 시의원을 배출함으로써 시의회에서 다수파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나는 나를 키워준 에이그런 시장에게 정치적으로 은혜를 갚고 우리 팀에는 다수당의 위치를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낸 셈이 되었다. 〈계속> 글.사진 올림 출판사

2009-10-0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5] 내가 왜 이런 떼 끼어들었지?

오렌지카운티는 연방의원은 물론이고 주 상.하원 의원 카운티의 행정 수반 격인 수퍼바이저 등이 공화당 출신 일색일 정도로 보수적인 정서와 공화당 지지세가 압도적인 곳이다. 주민 정서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지역 신문인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나 'LA타임스' 등도 편파적인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화당을 거들었다. 공화당에서도 이 지역 민주당의 상징인 에이그런 시장을 몰락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듯 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방어 논리를 폈다. 하지만 상대 팀이 공화당의 광범위한 지원을 받으며 펼치는 공세를 감당하기에는 힘이 달렸다. 베스 크롬 시의원이 시장 후보로서 적임자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주민들에게 알리고 크리스 미어스 부시장의 행태는 정치적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분위기는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이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우리는 유권자들을 일대일로 만나 설득하고 이해시켜 나갔다. 크리스 미어스의 배신으로 인한 파문이 차츰 가라앉을 즈음인 2004년 5월 민주당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지지도 조사에 따르면 나는 7명 후보 중에서 6위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인지도가 낮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치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당선권인 3위 안에 들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러나 발바리 캠페인이 본격화되고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나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가 급속하게 상승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9월쯤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최석호 위원과 함께 2 3위를 번갈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당선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역대 시의원 선거에서도 그랬듯이 불과 몇 백 표 몇 십 표의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한 표 한 표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거운동이 종반전으로 갈수록 한 표의 무게는 점점 더 무겁게 다가왔다. 실제로 2004년 11월 투표 결과는 내가 2만 6000표를 받아 3위로 당선되었지만 4위 후보는 나보다 불과 350표를 덜 받아서 낙선되었다. 선거운동이 한창인 8월 말 우리 팀에 또 한 번의 핵폭탄급 네거티브 공세가 날아들었다. 전력이나 도시가스 등 어바인의 유틸리티(utility) 즉 공익사업 운영권과 관련하여 에이그런 시장이 친구인 에드 도난 전 시의원에게 특혜를 주려 한다는 폭로였다. 상대 팀은 이 같은 움직임을 포착했다면서 이는 밀실 거래이며 정치적 야합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나는 청명한 날에 갑자기 천둥번개를 맞은 기분이었다. 유틸리티 운영 문제는 아직 결정된 것도 없고 더구나 에이그런 시장이 친구에게 특혜를 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에이그런 시장이 이런 민감한 시점에 의혹을 살 만한 행동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의 네거티브 공세는 집요했다. 우리 팀을 싸잡아 공격하면서 정치인의 신뢰 자질 문제까지 들먹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종류의 네거티브 공세는 정확한 내용을 잘 모르는 유권자들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민심이 들썩거리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베스 크롬 시장 후보를 비롯해 시의원 후보로 에이그런 시장 여성 교육위원인 데비 코번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뛰고 있었는데 여기서 잘못 대응하면 전패할 수도 있었다. 우리 팀은 총체적인 위기감 속에서 대응 방안 마련에 부심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09-3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4] 역시 정치란 진흙탕 싸움인가

"왜 그러세요 사모님. 제가 혼자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안쓰러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요… 우리 집에서 강 선생님께 세 표를 드릴 수 있었는데 남편이 지난주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미안하게도 두 표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글썽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유골이 오기로 예정된 날이라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서 배달원이 온 줄 알고 나왔노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한 표를 못 주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올랐다.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나도 황무지 같은 곳에서 한 표 한 표를 구하느라 힘든 캠페인을 하고 있지만 당신의 고통은 얼마나 더 크겠느냐며 마음의 위로를 전했다. "꼭 당선되어 돌아가신 남편의 뜻에 보답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이런 인연이 있었던 김 여사도 어바인 시장 선거를 치르면서 우연히 한 후원 모임에서 만났다. 김 여사는 사별한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아 그때 그 김 여사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그날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감격적인 재회였다. 나는 지난 3년 반 동안 한 한국어 라디오방송의 정치 칼럼니스트로서 매주 금요일마다 칼럼을 방송했다. 그때 김 여사 이야기도 방송에 소개한 적이 있었다. 나와 김 여사 로라 베이든 두 여성과의 애틋한 만남과 재회가 화제가 되면서 사람들은 나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보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이 같은 나의 경험담은 청취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숱한 에피소드와 인연이 생겨났지만 두 여성과의 만남과 재회 그리고 우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감동적인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반드시 당선되어서 이분들에게 보답해야겠다는 나의 결의도 점점 단단해져 갔다. 또한 공인이 되려면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느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주민 앞에서 겸손해져야겠다고 누누이 다짐했다. 발바리 유세는 길고도 힘든 여정이었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키 캥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캠페인이 종반전으로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나의 당선 가능성을 조심스레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인 언론들도 후보 단일화가 실패했을 때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지만 갈수록 뒷심을 발휘하는 한인 후보들을 보면서 서서히 강석희 최석호 두 사람의 동반 당선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사실 선거운동 초반은 위태로웠다. 각 정파에서 후보를 확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갈 즈음인 2004년 초 우리 민주당에 큰 위기가 닥쳤다. 재선이 유력시되던 크리스 미어스 부시장 겸 시의원이 갑자기 출마를 포기하고 반대쪽 후보팀을 지지하며 에이그런 시장 낙선 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미어스 시의원은 자신이 민주당의 시장 후보로 낙점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이그런 시장이 베스 크롬 시의원을 시장 후보로 추천하자 이에 반발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 성향이 짙은 오렌지 카운티에서 유일하게 민주당이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어바인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던 공화당은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다수파의 자리를 찾으려고 작정한 듯했다. 막대한 정치자금을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계속> 글= 올림 출판사

2009-09-2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3] '제가 안아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가슴 뭉클했던 기억도 많다. 선거를 두 달여 앞둔 9월 무렵이었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문고리에 홍보지를 걸어놓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자동차 한 대가 들어섰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주인이 차를 주차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40대 초반의 금발 백인 여성인데 한눈에도 수척해 보였다. 내 소개를 하고 지지를 부탁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녀는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인데 지금도 치료를 받고 오는 길이라 매우 피곤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픈 사람을 성가시게 했다는 생각에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녀는 괜찮다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서 관심을 보였다. 자신은 어바인 공립학교재단의 이사로 일하고 있어서 교육 문제를 공약으로 내세운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노라고 했다. 로라 베이든이라는 독일계 여성이었다. 우리는 20여 분간 교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첫 만남이었지만 생각하는 바가 비슷해 남다른 친밀감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완쾌하기를 빈다고 말하고 "제가 안아드려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쾌유를 바라며 포옹해 주었다. 나중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시의원에 재선된 다음 우리는 시청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알은체한 것이다. 나를 보더니 "수키 나를 기억하세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생각이 났다. 헤어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더니 그때는 항암 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쓰고 있었노라고 했다. 지금은 완치가 되었다면서 그때 나를 만난 뒤 나에게 한 표를 찍었다고 했다. 우리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3년 전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그녀의 완쾌를 기원하면서 위로의 포옹을 해주었을 때 진심을 느낄 수 있었노라며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 나의 친구 중 한 명이 되었고 진심으로 나를 지지하는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내가 시장 선거에 도전했을 때 그녀는 TV 캠페인에 출연해 나를 적극 지지하는 광고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클리선글라스라는 회사의 창업자로 어바인의 발전을 위해 부부가 함께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로라 베이든 그녀를 통해 나는 순수하게 진심으로 다가가면 누구나 감동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흐린 날이었다. 어느 집 문을 두드리니 김씨 성을 가진 한인 여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끔 한인동포의 집을 방문하면 크게 환영하며 용기를 북돋워주곤 했는데 이 집도 그런 집 중의 한 집이려니 했다. 그녀는 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남편과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꼭 당선되어 지역사회의 중요한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하면서 갑자기 눈물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당황했다. 왜 그럴까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행색이 초라하고 불쌍해서 그런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차림새를 훑어보았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2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2] "정치인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그래서 제가 출마하는 것입니다"

유권자들의 호의적인 반응들이 늘수록 걷는 거리도 덩달아 늘어났다. 물론 모두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바인은 오렌지 카운티 안에서도 보수적인 정서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공화당 유권자들이 훨씬 많다. 시의원 선거는 당적을 내걸고 하는 선거는 아니지만 어느 후보가 어느 당 소속이란 것을 알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맞추어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노크를 했더니 꼬장꼬장한 백인 노인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보통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의 표정을 보면 이 사람의 표가 내 표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감이 온다. 내 소개를 하고 지지를 당부한다는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그는 다짜고짜 "무슨 당 소속이오?"라고 물었다. 아시아계 후보가 시의원 선거에 나선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의원 선거는 당적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의 소속은 민주당입니다만 당적보다는 제 개인의 능력을 믿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보수적인 노인들 중에는 후보 개인의 능력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공화당만 찍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그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고 단단했다. 한번은 무섭게 생긴 개한테 물릴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집 앞뜰을 둘러싼 울타리의 문이 열려 있기에 일단 들어가서 현관문을 두드릴 참이었다.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살기를 띤 으르렁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은 사나운 사냥개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온몸이 뻣뻣해지며 소름이 쫙 끼쳤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인아 제발 빨리 나오너라 하는 기도가 저절로 읊조려졌다. 천만다행으로 마침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였다. 그는 내가 시퍼렇게 얼어 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왜 허락도 없이 자기 집에 들어왔느냐 자기 집 개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집 개였다면 물려 죽었을 거라며 쏘아댔다. 나는 일단 그냥 들어온 것은 내 잘못이지만 이런 큰 개를 풀어놓고 문을 열어놓은 것은 위험한 처사 아니냐고 대꾸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이 사람의 처신이 괘씸해서라도 이 집 표는 꼭 챙겨가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누구라고 소개를 했더니 집주인은 20년을 그 지역에서 살았는데 도대체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드네 주민들의 불만을 듣는 체만 하지 실천하는 게 없네 하면서 정치인과 공무원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출마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평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서 이렇게 발로 뛰어다니며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저에게 한 표를 주시면 그런 불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나는 20여 분 동안 내가 왜 출마했는지 당신이 느끼는 그런 불만이 나에게 왜 소중한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처음에는 역정부터 내던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감정도 누그러졌다. 그러더니 "당신 괜찮은 사람 같군. 당신을 찍어주겠소." 하는 게 아닌가. 거기에 덧붙여 자기 집은 대가족이라서 표가 많은데 가족 모두 나에게 표를 주겠다며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09-2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1] "방문 약속 지키다니 정말로 놀랍다"···'발바리 캠페인' 호응에 자신감 얻어

그렇게 힘이 빠져 지쳐가고 있을 무렵 조금씩 조금씩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후 시간에는 은퇴한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주부들과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심하던 노인들은 갈 길이 바쁜 나를 집 안으로 불러들여 20분이고 30분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나로서는 일분일초가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한 표가 아쉬운 판에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하루는 7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나왔다. 이번에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수키 캥'이라고 소개했더니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들어와 물이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나더러 소파에 앉으라고 하더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지역에 30년을 살았는데 집을 찾아온 후보는 당신이 처음이오" 하면서 "당신에게 꼭 표를 던지리다" 하는 게 아닌가. 분명한 한 표를 확보한다는 것이 그렇게 흥분되는 일일 줄은 미처 몰랐다. 힘이 불끈 솟았다. 그렇구나 발로 뛰는 것이 효과가 있구나 그래 끝까지 해보자.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개 방문하기 며칠 전에 엽서를 보내 언제쯤 집을 방문하겠다고 통지한 다음 찾아갔다. 사전 통지 없이 낯선 사람이 불쑥 찾아가면 경계를 하거나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바인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보수 성향의 주민이 많기 때문에 집을 방문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어떤 집에서는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이 보낸 엽서를 며칠 전에 받았지만 정말 이렇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진짜 당신이 와서 놀랐어요.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니 신뢰할 만한 사람인 것 같네요. 이번에 누굴 찍을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당신에게 투표하겠어요." 발품을 파는 노력에 대한 보상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내 앞에서 직접 표를 주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확신도 점점 커져갔다. 처음에는 서너 명의 자원봉사 학생들이 거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 감각이 없다 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분위기만 썰렁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엔 거의 대부분 혼자서 다녔다. 노크를 했을 때 사람이 있는 집은 네 집 가운데 한 집 정도에 불과했다. 사람이 없을 때에는 문고리에 홍보 팸플릿을 걸어놓고 메모를 남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에 점점 자신이 붙었다. 전자제품 유통 회사 서킷시티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할 때 많은 고객을 접해본 터라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나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일에는 자신이 있긴 했다. 정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객유권자에게 상품후보자을 파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바리 캠페인'을 한 달 정도 하니까 익숙해져서인지 피로감도 줄어들었다. 더구나 하면 할수록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지고 친근감을 보이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하루하루 돌아다니는 것이 오히려 놀이처럼 신바람이 났다. 어바인 지역에 한인 중국계 이란계 같은 소수계 이민자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도 인구의 절반을 넘는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얻지 못하면 당선 가능성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 주민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을 때는 더욱 힘이 솟았다. 어떤 백인은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신문에서 당신을 봤어요. 말이나 생각이 인상적이더군요" 하면서 기꺼이 한 표를 주겠다고 격려해 주기도 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23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0] "당신은 코리안인데 시의원 되면 공평하게 일한다고 어떻게 믿죠"

나는 최석호 위원을 만나 이미 기금 모금 파티도 했으니 한인사회의 여망을 존중해서 최 위원이 양보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최 위원의 입장은 단호했다. 나는 무명 인사고 자신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 오히려 내가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몇 차례 더 만나 단일화를 위한 협상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나를 필승 카드로 내세운 민주당을 생각하면 혼자만의 판단으로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단일화는 물 건너갔고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리는 길밖에 없었다. 후보는 모두 7명이었다. 이 중에서 3명이 시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이다. 우리 팀에서는 베스 크롬 후보와 함께 시장 임기를 마치고 시의원에 다시 도전하는 에이그런과 내가 반드시 당선되어야 계속해서 다수파majority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5월 말까지 포스터와 전단지를 만들고 기금 모금을 계속하면서 본격적인 캠페인을 준비했다. 6월부터는 에이그런 시장과 약속한 대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발바리 캠페인'을 시작했다. 무명 인사인 나로서는 발품을 팔아 유권자 한 명 한 명에게 얼굴을 알리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오전에는 사람들이 대개 집에 없기 때문에 주로 오후 시간을 택해 돌아다녔다. 하루 4시간 정도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며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수적인 주민들은 "당신은 코리안인데 시의원이 되면 코리안만 위해서 일할 것 아닙니까. 모든 주민을 위해서 공평하게 일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요?"라거나 "시의원이 되면 주민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건가요?" "왜 시의원이 되려고 합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한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 어느 도시의 시의원이 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서슴없이 그 사람을 지지할 수 있을까? 똑같은 질문이 계속 나왔지만 나는 녹음테이프를 틀 듯 "나는 어바인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시의원이 되겠습니다. 나는 우리 어바인을 가장 안전한 도시 교육과 환경 면에서 미국 최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라고 설명하며 지지를 구했다. 발로 뛰면서 주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도전의 나날들이었다. 자신감 하나로 뛰어들기는 했지만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했다. 하루 네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다녀도 150~200가구가 고작인데 1만 가구를 어떻게 돌아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강렬하기로 유명하다. 더구나 여름에 그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게다가 자원봉사자도 없던 시절이라 방문 유세는 고군분투 그 자체였다. 2주 정도 지나니까 피로가 물밀듯 밀려오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듯했다. 포기해 버릴까 그냥 홍보 우편물이나 발송하고 모임에 나가서 얼굴이나 알리는 손쉬운 캠페인으로 바꿀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오늘은 몸이 피곤하니까 하면서 어떻게 하면 방문 유세를 빼먹을까 궁리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22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9] "나는 유명인사이니 당신이 포기하시오"

정치자금은 개인들이 우편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의 선거 사무실로 보내는 수표로 모으기도 하지만 특정 장소에서 지지자들이 모여 저녁을 함께 먹으며 후원금을 모으는 '기금 모금 파티'(fund-raising party)가 일반화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지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분위기를 달구는 효과뿐 아니라 언론 홍보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도 있어 주요한 선거운동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내가 기댈 곳은 역시 한인사회뿐이었다. 시의원 출마 기자회견을 했던 LA 한인타운 옥스퍼드 팰리스 호텔에서 2월 17일 첫 기금 모금 행사를 가졌다. 이어서 그 다음 주에 오렌지카운티의 라마다 호텔에서 두 번째 행사를 열었다. 에이그런 시장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가 꺼내기 힘든 돈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한인들에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왜 자기가 강석희를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 뒤 강석희를 위한 재정적 후원을 부탁했다. 그의 연설에 감동받은 많은 참석자들이 자발적으로 수표를 써주었다. 이 두 번의 행사를 통해 무려 7만 달러의 돈이 모였다. 그만큼 동포사회의 지지는 뜨거웠다. 출마 기자회견을 한 뒤 한 달도 안 돼 7만여 달러를 모으자 에이그런 시장은 깜짝 놀랐다. 그도 수많은 기금 모금 행사를 해왔지만 한 번 행사에 1~2만 달러만 모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지에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키 정말 인기가 대단하군. 당신의 잠재력이 놀랍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라며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이 단지 동포라는 이유로 내게 그토록 열성적인 후원을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나의 활동을 인정해 주는 것이고 나에 대한 신뢰를 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한인사회에서 열심히 발로 뛰었던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자족감이 드는 한편으로 이런 엄청난 신뢰를 보여주는 동포사회에 실망을 안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한인동포사회의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면서 캠페인을 착착 준비하고 있을 즈음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어바인 시의 교육위원이었던 최석호 씨가 시의원 출마를 발표한 것이다. 최 위원은 공화당 소속으로 우리 쪽으로 봐서는 라이벌이었다. 한인 시의원 한 명을 탄생시키자면 얼마 되지 않는 한인 표를 모두 긁어모아도 아쉬울 판인데 한인 후보가 두 명이나 나서면 둘 다 떨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최 위원은 어바인에서 SAT학원을 운영하면서 교육위원을 두 번이나 지냈기 때문에 인지도 면에서 나보다는 훨씬 앞서 있었다. 내가 불리할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명했다. 한인 언론들은 과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군부 정권을 연장시켜 준 뼈아픈 과거를 상기시켰다. 이들은 사설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루라고 촉구하면서 두 사람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면 필패라고 지적했다. 큰 암초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최 위원이 시의원에 출마할 것이란 예상은 조금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2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8] 발바리, 2만 가구를 두드리다

그러나 당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분석도 많았다. 한인사회에서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고 부지런한 사회 활동가라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출마 지역인 어바인에서는 신인이기 때문에 11월 선거 때까지 과연 얼마나 인지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언론들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스스로도 열심히 뛰겠다는 마음뿐이었지 당선 가능성 부분에 가면 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큰 격려가 된 고맙고도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생각난다. LA 한인타운에서 상법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영 씨다. 그분은 내가 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며칠 뒤 '중앙일보' 오피니언 난에 '어느 (이민) 1세의 정치 입문'이란 제목으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강석희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온 1세권 이민자다. 필자와 동년배라는 공통점을 빼고는 학연이나 지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의 정치 입문 과정을 지켜보며 그의 길이 정치 지망생들이 본받아야 할 정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지망생들도 강씨처럼 정치 입문의 옳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강씨가 미국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미국 정치인들과 고리를 만든 뒤 한인사회와 연결하는 역할을 했고 정치를 봉사직인 시의원부터 시작하는 것도 칭찬할 만한 일이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모으는 일은 한인사회에 대한 봉사다. 그런 봉사를 제대로 한 사람만이 한인사회에 도움을 청할 자격이 있다. 나와 아무런 친분도 없는 분이 나의 당선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내가 출마를 하게 된 이유 그리고 출마할 자격에 대해서 인정해 주는 글을 신문에 써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김지영 변호사가 나에게 큰 격려를 보내준 그 글을 신문에서 오려서 잘 보관하고 있다. 이제는 돈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에이그런 시장은 최소한 10만 달러를 모아야 하는데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자신은 없지만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미국에서 정치자금은 매우 엄격하게 관리된다. 소수의 사람에게서 많은 돈을 받으면 그 소수의 이해관계에 좌우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아예 법으로 정치자금의 한도를 규정해 놓고 있다. 모든 정치자금은 개인 수표로 기부해야 한다. 어바인 시의 선거법도 1인당 후원금을 360달러로 제한하고 있다. 재력 있는 몇 명이 정치인에게 큰돈을 주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소액의 정치자금을 기부받느냐가 선거의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을 보면 누가 얼마를 모금했다 누구의 모금 실적이 앞선다 하는 식의 보도가 계속 나오는데 그것은 모금 실적으로 그 후보의 지지세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모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액 기부자 즉 지지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금 실적이 당락을 점치는 척도로 왕왕 이용되는 것이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17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7] "시의원 출마" 밝히자 가족들 걱정의 눈빛

아내가 "당신 정치할 거라는 소문이 많던데 정말 정치를 할 거예요?" 물으면 나는 "정치는 무슨 정치 그저 한인사회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지 뭐.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고 안심시키곤 했다. 나의 외도(?)에 못마땅해 하던 아내는 내가 너무 나아갈까 봐 중간중간 견제구를 던지곤 했다. 서로 언성을 높이는 적도 있었다. "나 한 사람 우리 가족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사는 삶도 있지만 공익을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 그런 삶도 있지 않겠소. 나는 남은 인생을 한인사회의 정치력을 키우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당신이 이해해 주고 도와주면 고맙겠소." 나는 아내를 이렇게 설득했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를 응원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번 뜻을 세우면 쉽게 꺾지 않는 나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시의원 출마 결심을 밝히자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2004년 2월 5일 드디어 출마 결심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는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내가 살고 있고 시의원으로 출마하는 지역은 오렌지 카운티의 어바인 시였지만 어차피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언덕은 LA 한인사회였다. 그래서 기자회견 장소도 한인동포사회의 중심지인 LA 한인타운의 옥스퍼드 팰리스 호텔로 잡았다. 첫인상이 차가워 보인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안경을 무테로 바꾸고 편안하게 미소 짓는 연습도 많이 했다. 기자회견장에는 양대 한인 신문사인 〈중앙일보>와 〈한국일보>를 비롯해 라디오 TV 주간지 등 한인사회의 거의 모든 언론 매체 기자들이 출동했다. 그동안 민간 정치 활동을 하면서 한인사회에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던 데다가 정치에 뛰어들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분명한 뜻을 밝힌 적이 없어 이날의 기자회견은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한인사회는 나를 키워준 곳입니다. 오랫동안 한인사회의 발전을 보아왔습니다. 나 개인의 명예가 아니라 한인동포사회의 정치력 신장과 지역사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모습과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고 실제 그런 사람임을 증명해 드리기 위해 어려운 결심을 했습니다. 어깨가 무겁지만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은 역시 당선될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신 있다고 하기보다는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열심히 뛰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며 살아왔습니다. 지금 여건은 어느 것 하나도 우호적이지 않지만 저는 저의 능력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절대적인 성원이 중요합니다. 확실하게 밀어주십시오." 출마 선언을 한 다음 한인 언론에서는 각종 분석 기사와 사설들이 잇따랐다. 나를 아는 사람들의 걱정 반 기대 반의 반응도 이어졌다. 한인 언론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꾸준하게 활동해 온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었다. 지역 정치인은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도 나왔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16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 "너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해"

어바인 시의회는 시장을 포함해서 5명의 시의원으로 운영된다. 오렌지 카운티는 전통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공화당이 오랫동안 독식해 온 탓에 민주당 출신들이 정치적으로 자리를 잡기가 정말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은 에이그런 시장시장도 시의회 의결권이 있다과 시의원 2명을 포함해 3명이었기에 상대 공화당의 2명을 앞서 있었다. 물론 시의회에서는 당적을 내걸 수 없도록 정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당이 어바인의 집권당이었다. 시의회에서 수적으로 열세면 시장이라 할지라도 시정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주도하기는 어렵다. 에이그런 시장은 민주당의 상징적 인물이어서 반대편의 공화당으로부터 항상 도전과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2004년 말이면 임기가 끝나고 3연임 금지 조항에 묶이는 상황이어서 같은 팀인 베스 크롬 시의원을 시장 후보로 내세웠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시의원에 출마하더라도 민주당 출신 시의원이 한 사람 더 당선되어야만 민주당이 다수파로서 계속 의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에게 시의원 출마를 제안한 것은 상당한 정치적 모험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믿고 과감하게 출마를 제안한 에이그런 시장이 너무 고마웠다. 당시 현지 동포 언론들은 나의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는 뉴스를 간간이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날 에이그런 시장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말했다. '시의원 출마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는데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라는 이야기였다. 그 반응을 보고 나서 최종 결정을 하라는 의미였지만 그는 이미 나의 지인들이 출마를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선거가 있던 해인 2004년 1월 나는 800여 명의 지인에게 일제히 편지를 발송했다. 회신용 엽서에는 몇 가지 설문과 함께 나의 시의원 출마에 대한 의견을 묻는 칸을 두었다. 보통 미국에서는 이렇게 다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회신을 받는 비율이 5퍼센트를 채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내가 100여 통의 답장을 받은 것은 놀라운 수치였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어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예상보다는 훨씬 많은 답장이 왔다. 그리고 더욱 깜짝 놀랐던 것은 정치 입문을 반대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어느 미국인 친구는 "It's about time! 이제 때가 되었다!"이라면서 내가 정치에 나서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너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친구들의 격려도 많았다. 확신이 없어서 미적거리던 내게 이들의 편지는 큰 힘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래 가는 거야. 해보는 거야. 최선을 다하면 후회는 없을 거야.' 나는 스스로 최면을 걸며 에이그런 시장에게 나의 결심을 알렸다. "그것 보시오. 내가 진작에 알아보지 않았소. 이제 뒤돌아볼 것도 없이 앞만 보고 뜁시다." 나는 그에게 많이 가르쳐주고 밀어달라 나는 열심히 뛰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 둘은 서로 손을 꽉 잡으며 한배를 타는 민주당 출마팀으로서 정치적 동지로서 의기투합했다. 아내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말려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자포자기했는지 내 결심을 전하자 뜻대로 하라고 마지못해 인정해 주었다. 사실 LA폭동 이후 내가 한인사회 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속으로 불만이 적지 않았다. 아니 걱정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듯싶다. 정치나 정치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은 터에 내가 슬슬 정치 활동을 넓혀 나가자 못마땅해 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09-1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 '10만 달러는 모르겠지만 1만가구 방문은 자신있소'

차량을 구입할 때 복잡한 영문 계약서 때문에 소수계 이민자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를 시정하기 위해 중국계 주디 추 의원이 계약서 이중언어 표기 법안을 제안했을 때도 나는 한인단체들과 함께 이를 이슈화하고 서명 운동 등을 펼쳐 법안 통과에 일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우리가 정치에 눈을 뜨면 뜰수록 소수계 이민자들의 권익이 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점점 더 정치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정치란 잘만 하면 재미와 보람 스릴을 맛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에이그런 시장과의 인연을 계기로 나의 활동은 더욱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에서는 나를 정치 활동가 정치 지망생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나는 발을 뺄 수도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정치권 인사'가 되어버렸다. 일요일 아침에 에이그런 시장은 그물에 갇힌 고기를 건져 올리듯 손쉽게 고기를 잡은 것이고 나는 스스로 그들의 그물에 다가간 셈이 되었다. 자기편 한 명을 끌어들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관찰해 왔을 그의 입장을 생각하니 그분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라도 이제는 '노'라고 말하기엔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것이다. "주위에서 한번 뛰어보라는 권유가 많아서 해볼까 하는 의향은 있습니다만 아직 확신이 서지를 않습니다. 제가 살아온 경험을 비추어볼 때 뭐든 하게 되면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설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용도 거부도 아니었다. 어쩌면 유보적인 승낙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자 에이그런 시장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의미 있는 미소를 던졌다. 그러고선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뜨더니 반쯤은 친근하게 반쯤은 사무적인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수키 내가 지금 당신이 두 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를 물어보겠소. 만약에 이 두 가지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당신을 다음 시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그는 나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하나는 10만 달러 정도의 정치자금을 모을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내가 어바인 시에서 얼굴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니 적어도 1만 가구 이상을 두 발로 걸어서 가가호호 방문하며 유세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림잡아 6만 가구 가운데 1만 가구를 방문하여 다시 말해서 초인적인 발품을 팔아서 얼굴 알리기를 할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10만 달러를 모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1만 가구를 두 발로 걸어서 유세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고 대답했다. 돈을 모으는 일이야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집집마다 방문하는 일은 내가 부지런하기만 하면 되니까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동안 주말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일만 하다시피 살아온 터라 몸으로 때우는 일쯤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얼핏 25년 전 미국 땅을 처음 밟은 뒤 두 달여 만에 전자제품 유통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을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만 흘렀을 뿐 그때의 상황과 너무 흡사했던 것이다. 면접관들은 이민 온 지 두 달밖에 안 되는 동양계 청년이 뭘 하겠나 싶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했던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석 달만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들이 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 광경이 떠올라 나는 혼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내 대답을 들은 에이그런 시장은 활짝 웃으며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09-1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 한인사회 민간 정치인 활동 "아! 이런 맛에 정치하는구나"

◇수키 캥 주사위를 던지다 2003년 말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일요일 아침이었다. 에이그런 시장이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찾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연휴에 들어가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데 모여 모처럼의 시간을 갖는 때여서 웬만해서는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약속을 잡지 않는 게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그것도 일요일 아침에 나를 보자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그가 나에게 정치에 나설 생각이 없느냐고 툭 던지듯 물어보았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시기에 불쑥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 장소는 미국인들이 휴일이면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즐겨 찾는 '아이홉'이라는 프랜차이즈 식당이었다. '아니 그냥 밥이나 먹자는 건지도 몰라.'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뜻밖에 안면이 없는 다른 백인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평소 허물없이 농담을 던지던 에이그런 시장까지 다들 자못 진지한 표정이었다. 가벼운 자리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얼핏 스치며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에이그런 시장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수키 내가 지원해 줄 테니 어바인 시의원에 출마하지 않겠소?"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한다면 나 스스로는 물론 그들에게도 정직하지 않은 사람으로 비칠 것이 뻔했다. 얼떨결에 불려나간 그 자리는 '정치인 강석희'의 가능성과 내 의중을 타진하기 위한 면접 장소가 되고 말았다. 초면의 두 사람은 내 반응을 열심히 평가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민간인 신분으로 준정치적인 활동에 깊숙이 관여해 온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한인 인사들의 후원 모임인 한미민주당협회 회장과 고문 그리고 한미연합회 이사장 직책을 맡으면서 다양한 민간 정치 활동에 참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이 하나둘씩 결실을 거두면서 정치하는 맛 정치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보람을 간접 체험하기도 했다. '아 이런 맛에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간간이 들었다.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사회 활동에 뛰어든 이후 마치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듯 나는 점점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나는 어느덧 한인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회 활동가 민간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융통성 없는 법 집행으로 떡을 냉장고에 넣어서 판매하라는 캘리포니아 위생당국의 말도 안 되는 조치에 한인사회와 함께 대응해 상온에서 24시간까지 보관하고 팔 수 있게 하는 예외 법안을 만들게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동포들이 많이 속해 있는 세탁소 업계에서 환경오염을 이유로 그동안 써오던 기계를 바꾸라는 법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도 적극 나서서 시행을 막았다. 법안대로라면 한인 세탁업소들은 줄줄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다. 한인단체들은 세탁협회와 손잡고 영세업소들의 형편을 고려해 법안 시행을 연장해 달라는 운동을 벌여 이를 관철시켰다.〈계속〉 글.사진 제공=올림픽출판사

2009-09-1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3] 1992년 4·29 폭동 충격···톱 세일즈맨서 정치입문 결심

사실 나는 미국에 온 이후 일과 가족밖에는 모르고 살았다. 정신없이 일했고 그 덕분에 첫 직장이었던 전자제품 유통 회사 '서킷시티'에서 유일한 동양계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실적이 좋아서 상도 많이 받았고 아내와 눈코 뜰 새 없이 맞벌이를 하면서 다른 한인 이민자들보다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경제적 안정도 이룰 수 있었다. 내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그해 4월 29일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의 아비규환 속에서 한인 사업체들이 약탈당하고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한인 타운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정치력이 없어서였다. '운명적인'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할까 나는 우리 동포사회의 힘을 키우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를 계기로 자신과 가족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개인 강석희'는 하루아침에 '사회인 강석희'가 되었고 에이그런 시장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애초부터 정치에 목표를 두고 그것을 향해 디딤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나를 보고 정치에 나서보라는 동포들도 있었지만 흘려들었다. 미국에서 정치를 하려면 적어도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해야 하고 미국적인 사고와 행동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본적인 배경을 갖추고 거기에 더해 정치적인 야망과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치인이 되기에는 여러 면에서 자격 미달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만 24세에 미국에 온 1세 이민자인 데다가 가장 내세울 이력이란 게 톱 세일즈맨뿐이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민 1세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모국어로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영어는 어쩔 수 없이 한국식 액센트가 담긴 외국어일 뿐 모국어 수준과는 역시 거리가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휘력이나 구사력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인맥이라고는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생들이 전부였다. 그러니 미국에서 정치인을 꿈꾼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한인사회를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는 나를 보면서 선.후배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치 입문을 고려해 보라'고 권유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러나 베테랑 지역 정치인 그것도 내가 흠모하던 에이그런 시장에게서 정치 입문을 생각해 보라는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가 뭘까 혹시 나는 스스로를 너무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라는 게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도전할 수 있는 분야일까 내가 정치인이 된다면 어떤 보람이 있을까 정치인 강석희는 과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인물이 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정치' '정치인'이란 단어가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정치에 관심없다'던 강석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계속> 글.사진 제공=올림픽출판사

2009-09-0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2] '수키, 정치에 관심 없어요?'

에이그런 시장은 차분한 나와는 대조적으로 성격이 불같았지만 공익에 봉사해야 할 정치인과 공무원의 마음가짐에 대한 생각은 너무도 딱 맞아떨어졌다. 인식의 눈높이가 같았던 것이다. 정의파이면서 원칙주의자이고 사명감 또한 투철하여 나의 정치적 모델로서도 한 점 아쉬움이 없다. 그 후 에이그런 시장과 나는 수시로 연락을 취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한인사회의 이런저런 행사에 그를 자주 초대했다. 내가 중간에서 에이그런 시장을 수시로 초대하는 바람에 한인 커뮤니티와 시장의 만남이 빈번해지면서 한인사회-커뮤니티 활동가 강석희-에이그런 시장의 삼각관계는 더욱 긴밀해져 갔다. 우리가 처음 만난 2002년 말 마침 에이그런 시장의 재선 여부가 달린 선거가 있었다. 나는 그해 9월부터 그의 재선 캠페인을 돕기 위해 본격적으로 캠프에 참여해 한인사회에 그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다행히 에이그런 시장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우리는 정치적 동지로서 더욱 굳건한 관계를 맺어 나갔다. 당시 나는 한미민주당협회 고문과 오렌지 카운티 한미연합회 이사장으로서 각종 커뮤니티 행사에 나서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에이그런 시장은 나와 친해진 덕분에 한인 커뮤니티 행사에 그야말로 '뻔질나게' 불려 나와야 했고 그러면서 한인사회와 점점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내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에이그런 시장은 만족스러워했고 한인 커뮤니티와 관련된 각종 현안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개인 강석희'에서 '사회인 강석희'로 2003년 8월 오렌지 카운티 한인축제가 열렸다. 매년 한 차례 열리는 이 축제는 한인 이민자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전통 음식과 각종 여흥으로 향수를 달래는 한편으로 다른 커뮤니티에도 한인사회를 알리는 행사다. 지금은 베트남 커뮤니티의 텟 페스티벌과 함께 오렌지 카운티의 대표적인 소수계 문화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한인사회에 대한 애정이 무르익은 에이그런 시장은 그날 노래자랑 무대에 초대 손님으로 올라가 아리랑을 불러 수천 명의 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한국어를 영어 발음으로 적어서 부르라고 주었으니 속으로는 시장 해먹기도 참 힘들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서 노력하는 그가 참 고마웠다. 어느 날 에이그런 시장이 사적인 자리에 나를 불렀다. "수키(미국인들은 내 이름을 이렇게 부른다) 당신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오. 지금까지 내가 관찰한 바로는 당신은 진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사실 내가 좋아서 무언가 성취감을 느껴 한인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과분한 칭찬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고 내가 좋아하고 보람을 느껴서 할 뿐입니다. 제 능력을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수키 정치에 관심 없어요?" "정치요? 그건 제가 나설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분수는 제가 잘 알지요. 저는 정치할 그릇이 못 됩니다."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 2월 시정 연설에 앞서 나를 소개하는 에이그런 부시장. 나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계속〉

2009-09-0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1]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선포' 성사 뿌듯

이 책엔 인간 강석희가 이민 1세대로서 갖은 어려움과 한계를 극복하고 어바인의 수장으로 등극하기 까지의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본지는 OC섹션 창간 특집으로 강 시장의 자서전을 연재하기로 했다. '유리천장 그 너머'는 언어와 문화차이로 고전하는 1세들은 물론 후세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장벽도 노력 여하에 따라 뚫고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이다. ◇ 제 1장 내 이름은 수키 캥 -정치적 스승과의 운명적 만남 "내년 1월 13일이면 우리 한국인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지 100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우리가 무엇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미국 사람들은 우리의 이민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겁니다. 우선 우리가 사는 어바인 시정부 차원에서라도 미국 이민 100주년을 기념할 수 있도록 우리가 앞장을 서야 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우리가 가만있을 수 없죠." 2002년 8월 당시 오렌지 카운티의 '한미연합회'라는 동포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시민단체의 이사장을 맡고 있던 나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률 변호사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10여 년간 어바인에 살다가 인근의 애너하임으로 이사 가 8년여를 산 뒤 다시 어바인으로 막 이사를 한 상태였다. 어바인에서는 공적인 일을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시정부 쪽으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2003년 1월 13일을 기해 어바인 시정부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의 해'로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중간 다리 역할은 김 변호사가 맡았다. 그는 당시 재선 임기 중이던 래리 에이그런 시장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친분이 있다고 했다. 김 변호사의 주선으로 나와 김 변호사 에이그런 시장 그리고 부시장 이렇게 4명이 시장 집무실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훗날 나의 정치적 스승이자 멘토가 된 에이그런 시장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에이그런 시장은 자신감이 넘치는 인상이었다. 하기야 시의원과 시장을 번갈아 맡으며 20년 이상 어바인을 대표하는 지역 정치인의 대명사로 자리획 굳힌 인물이니 오죽하겠는가. 둥근 쇠테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전노장의 백인 정치인에게 한국 이민자를 위해 시정부에서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의 해'로 선포해 달라는 주문이 과연 먹힐까.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어렵게 내가 말을 꺼냈다. "지금 미국에는 200만 명이 넘는 한인 이민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민을 시작한 역사가 내년이면 100년을 맞습니다. 한인들은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아 성공적인 이민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한인동포의 절반 이상이 LA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남부에 밀집해 살고 있습니다. 어바인은 한인동포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이며 최근에 유입 인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대충 이렇게 배경 설명을 하고 2003년이 한인 이민자가 미국 땅을 밟은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니만큼 시정부 차원에서 이를 기념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스승이자 동반자 에이그런 시장 에이그런 시장이 다인종 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이란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왜 이제야 찾아오셨습니까. 나도 LA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코리아타운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 땅을 밟은 지가 벌써 100년이 됐습니까? 아 이민 역사가 그렇게 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놀랍군요. 당연히 시정부 차원에서 기념을 해야지요." 어바인이 살기 좋은 도시로 소문나면서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소수계 특히 아시안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그런 시장은 다인종 문화에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20년 전 시장으로 있을 때 어바인 시의 자매결연 프로그램을 처음 입안하고 이후 일본의 쓰쿠바 시 타이완의 타오위안 시 그리고 멕시코의 에르모시요 시 등과 자매결연을 맺어 다인종 문화에 대한 식견과 이해가 깊은 인텔리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시도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의 해'를 선포하려면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우려하던 차여서 에이그런 시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대화는 두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우리는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미국에 오게 된 배경 서킷시티라는 전자제품 유통 회사에서 15년간 세일즈맨과 매니저로 일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울러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는 말도 전했다. 에이그런 시장도 자신이 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시의원과 시장으로서 일하고 있는지 공직자로서 자신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서로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다 보니 코드가 맞았다고나 할까 흥이 났다. 나는 에이그런 시장과의 흥미로운 대화를 끝내면서 '아 저 정도의 인물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도 후회가 없겠다 아니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고 보니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에이그런 시장은 나에게서 한인 커뮤니티의 좋은 지도자감이란 인상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의 인연을 계기로 에이그런 시장과 나는 암묵적인 정치적 동반자요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가 57세 내가 49세 때였다. 민주당 당적인 에이그런 시장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수재다. 지역사회에 봉사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던 그는 어바인에서 1978년부터 1990년까지 12년간 시의원을 지내며 시의원 중에서 선임되는 간선 시장도 몇 차례 지내다가 공화당 측의 낙선 운동에 밀려 8년간 정치적 공백기를 보내기도 했다. 1992년 대선 때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을 정도로 배포가 크다. 또 인지도가 낮다고 후보 토론회에서 배제하자 거칠게 항의하여 당시 토론회가 열렸던 시카고를 들썩거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편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불필요하게 적을 많이 만든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글.사진 제공=올림출판사 〈계속〉

200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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